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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 거리/책 읽기

[책] 농담, 밀란 쿤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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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저자(글) · 방미경 번역
민음사 · 1999년 06월 25일
 

 
- 어디선가 이름은 들어봤던 밀란 쿤데라의 책을 드디어 읽어봤다. 기대보다는 내 취향이었다.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읽고 싶어졌다.
- 사회주의 사회를 살아본 사람의 이야기라니 재밌을까 싶었는데 재미도 있었고, 생각할 거리도 많았고, 내가 살아온 사회와의 유사성도 발견할 수 있었고. 
- 캡쳐한 곳이 꽤 있다. 지금 생각나는 내용은 초반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나이가 겨우 스무 살 남짓이라는 내용을 강조하는 부분과 30대 중반(?)이 된 주인공이 아마도 스무살 남짓인 젊은이들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부분. 그리고 지금도 너무나 역겹게 느끼지는 자신의 부도덕한 행동에 신의 뜻을 가져다 붙이는 코스트카(?)의 자기변명들. 불륜 같은 부도덕은 나에겐 별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행동을 신의 뜻 어쩌구 하면서 합리화(?)하는 게 너무 역겨웠다.
- 공산당 학생위원회(?)의 일원이었던 루드비크가 자신이 쓴 엽서 한 장으로 당에서 축출되는 시기도 20대 초반, 그 결정을 한 사람들도 20대 초반, 당에서 축출되어서 검정 표지 군대에 갔을 때 상관(?)도 20대 초반, 아버지가 당에서 찍혀 간첩(?)이 되어서 검정 표지 군대에 오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보다 당을 더 선택했던 군인이 그 당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 일로 당에서 축출되었을 때 생을 마감하게 되는 시기도 20대 초반. 이 군인의 이야기가 제일 안타까웠다. 젊은이의 열정(?)으로 사상(이데올로기)을 선택했는데 그 사상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괴로움을 내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슬프긴 제일 슬픈 장면이었다. 믿음으로부터 배신당하는 행위가 슬프긴 슬픈 일인가 보다. 에고이스트가 그렇게 슬펐던 이유도 당연히 삶이 계속될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젊음이라는 믿음이 배신당해서인가 싶다. 아니면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는 인생들에 대해 특히 내가 더 공감하거나. 소년이 온다도 그렇고. 
-> 아! 이제 내가 젊은이라고 쓰더라도 나와 젊은이가 구별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젊은이라고 쓰는 게 어색한데 다른 표현이 생각이 안 나네.
 
- 책이 두껍다. 지하철에서 손에 들고 읽기 무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을만한 글이었다.
 
# 책 속에서
- 55쪽 3부 루드비크
    때로 (진짜 걱정이 되어서라기보다 장난 삼아) 나는 개인주의라는 비난에 반기를 들고 학습 모임 동료들에게 증거를 요구해 보기도 했다. 특별히 구체적인 어떤 것은 없고, 다만 '너는 그렇게 행동하니까.'라는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데?" "언제나 묘하게 웃잖아." "그래서? 난 즐거움을 표현하는 거야!" "아니야, 너는 혼자서만 마음에 담아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웃어."
    내 행동과 미소가 지식인(당시 또 하나의 유명한 경멸어) 냄새를 풍긴다고 동료들이 판단을 내렸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고 혁명 자체가, 시대 정신이 틀릴 수도 있으며, 나 하나가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으므로(감히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 말을 믿게 되었다. 나는 미소 지을 때 조금 조심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곧 내 안에서 (시대 정신에 맞추어) 내가 되어야만 하고 되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 코뿔소병이 생각나는군
 
- 92쪽
    그날 우연히 그와 단둘이 있게 된 적이 있었다. 별 생각없이 나는 그냥 "도대체 어떻게 총을 그렇게 정확하게 쏘세요?"라고 말을 건넸다.
    그 작은 하사는 나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 내겐 특별한 게 있지. 이건 양철 표적이 아니다. 이건 제국주의자다. 그렇게 속으로 말하는 거야. 그래서 분노로 부글부글 끓으며 과녁 복판을 직방으로 맞춘다니까."
    나는 그가 제국주의자라고 하는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으로 어떤 인간을 상상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는 내가 묻기도 전에 심각하고도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난 너희가 왜 그렇게 나한테 박수를 치고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 생각해 봐. 전쟁이 터지면 어쨌거나 내가 총을 쏘게 되는 건 바로 너희들일 텐데!"
    우리에게 목소리를 높여 야단 한번 친 적이 없는 --- 그래서 나중에는 전속이 되기까지 한 --- 이 순진한 존재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당과 동지들에게 나를 연결해주었던 끈이 이제,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이, 내 손에서 스르르 풀려 떨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삶의 길 밖으로 내던져진 것이었다.
 
- 98~99쪽 3부 루드비크
    그 시절 나와 운명을 같이했던 다른 병사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만 이야기해 보겠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혼자였다. 우리가 처음 나누었던 대화 하나가 기억난다. 갱도에서 잠깐 쉬는 시간에 (간식을 먹으며) 혼자와 둘이 앉아 있게 되었는데, 혼자가 내 무릎을 툭 치며 말했다. "야, 벙어리, 넌 대체 뭐하는 놈이냐?" 그 당시에 나는 (내 속에서 끊임없이 진행되는 자신의 변론에만 골똘히 몰두한 채) 정말로 귀머거리에 벙어리였다. 나는 내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으며, 정말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애를 써 보았다. (그러나 그 말들은 내가 듣기에도 곧 인위적이고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내게 말했다. "야, 이 멍청아! 그럼 우리는, 우린 여기 왜 있는 것 같으냐?" 다시 한 번 그에게 내 견해를 (보다 자연스러운 말을 찾아) 설명하려 들자 혼자는 먹던 것을 마저 삼키더니 차분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니가 멍청한 것만큼 키도 크다면 저 해가 니 골통을 아주 구워 버리겠다." 이 문장에 스민 변두리 하층민의 기지는 내게 비웃음을 던지고 있었고, 나는 문득 부끄러워졌다. 바로 모든 특권의 거부에  기초하여 내 신념을 확고히 세웠으면서 나는 응석받이 어린애처럼 잃어버린 특권을 돌려달라고 계속 애걸복걸하고 있었으니.
 
- 124~125쪽
    바로 이런 일들(너무도 전적으로 그 시대 것이어서 곧 그 용어조차 뜻모를 소리가 되어 버릴 일들)을 하다가 나는 파멸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 그 일들에 계속 집착했다. 여러 위원회에 소환되었을 때 나는 나를 공산주의로 이끌었던 동기를 수십 가지는 늘어놓았지만, 이 운동에서 무엇보다 나를 매혹시키고 심지어 홀리기까지 했던 것은 내 시대의 (또는 그렇다고 믿었던) 역사의 수레바퀴였다. 그 당시 우리는 정말로 사람이나 사물의 운명을 실제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학에서 특히 더했다. 당시 교수단에는 공산당원이 한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에 처음 몇 년간 학생 당원들이 교수 임용도 결정하고 교육 개혁이나 교과 과정 개편도 결정하는 등 거의 단독으로 대학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우리가 맛보았던 그 도취는 보통 권력의 도취라고 불리는데, 나는 그러나 (약간의 선의로) 그보다 좀 덜 가혹한 말을 고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는 역사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말 위에 올라탔다는 데 취했고, 우리 엉덩이 밑에 말의 몸을 느꼈다는 데 취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결국 추악한 권력에의 탐욕으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의 모든 일에 여러 가지 면이 있듯) 거기에는 동시에 아름다운 환상이 있었다.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이제 역사의 바깥에 머물러 있거나 역사의 발굽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이끌어 나가고 만들어 나가는 그런 시대를 우리, 바로 우리가 여는 것이라는 그런 환상이 있었다. 
    나는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떠나서는 삶은 삶이 아니라 반 죽음이며, 권태이고, 유배이고, 시베리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150쪽
    당시에 내겐 그에 대해 증오밖에 없었으며, 이 증오란 것은 너무도 강렬한 빛을 발사해서 그 속에서는 사물의 윤곽이 사라져 버리는 법이다. 중대장은 내게 그저 앙심을 품은 교활한 쥐새끼같이만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그를 무엇보다 한 젊은이로, 연기를 하는 한 사람으로 보게 된다. 어찌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 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연기를 한다.
    우리의 중대장 역시 아직 미완인 사람이었고, 어느 날 아침 자신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우리 무리 앞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상황에 잘 대처해 나갈 수 있었다. 전에 어디서 읽었거나 들었던 것이, 그와 유사한 상황을 위해 이미 만들어진 기성의 가면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만화에 나오는 건장한 주인공, 부랑자 무리를 길들이는 강철같은 완력을 지닌 젊은 남자, 호언장담 같은 건 하지 않고 오로지 냉정한 침착성, 정곡을 찌르는 간결한 유머, 자기 자신과 힘센 근육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남자 등등. 어린애 같은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면 할수록 그는 슈퍼맨이라는 자신의 역할을 더욱더 광적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와 같은 젊은 연기자를 만난 것이 처음이었을까? 엽서 건으로 사무국에서 심문을 받을 때 나는 겨우 스무 살을 갓 넘겼고 나를 심문하던 이들도 나보다 한두 살 밖에 더 많지 않았다. 그들 또한 무엇보다 우선, 자신들이 가장 탁월하다고 믿는 가면, 즉 금욕적이며 강직한 혁명가의 가면 아래 자신들의 완성되지 않은 얼굴을 감춘 어린아이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르케타는 어땠는가? 구원의 여인 역할을, 그것도 잠시 유행하는 싸구려 영화를 보고서, 그 역할을 연기하려 들지 않았던가? 또 제마네크는, 갑자기 온 마음을 다하여 도덕이라는 것에 열광했던 그는? 그것은 어떤 배역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나는? 역할이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나는 혼란스러워하며 이 역할 저 역할을 왔다 갔다 하던 끝에, 결국 어디로 도망쳐야 하나 어쩔 줄 모르다가 붙잡힌 것이었다.
    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희랍 비극 배우의 장화를 신고 다양한 무대 의상 차림으로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 광적으로 신봉하는 대사들을 외워서 읊으며 누비고 다니는 그런 무대다.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도 자주 놀이터가 되어 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네로라는 풋내기, 나폴레옹이라는 애송이, 흥분하여 날뛰는 수많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흉내내는 열정이나 간단하게 맡아 버린 역할들은 처참하도록 실제적인 현실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내 머릿속에서 모든 가치 체계가 흔들려 버리고 젊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엄청난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또 반대로 역사의 불한당들이 한 일이 갑자기 그저 미숙아들의 무시무시한 동요로밖에 보이지 않으면서 그들에 대하여 역설적인 너그러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 186쪽
    .... "자, 이제 읽어 봐!" 알렉세이는 진흙이 묻은 턱을 들고, 편지를 내내 꼭 쥐고 있던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여전히 엎드린 상태로 읽어 나갔다. "당신은 1951년 9월 15일자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으로부터 축출되었음을 통보합니다. 지방 당위원회는......."  중대장은 알렉세이에게 원위치로 돌아가라 명했고, 하사관에게 명령을 내려 훈련이 시작되었다.
 
- 200쪽
    ...문득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 죄스러웠다. 그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이 저세상으로 가 버렸고, 나는 여기에서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도 그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단지 알렉세이를 잃었다거나 한 사람을 구할 수도 있었던 유일한 기회를 잃어버린 것만이 아니었다. 오늘날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 일을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검정 표지 동료들과의 연대 의식 또한 잃어버렸고, 그로 인해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역시 상실한 것이었다. 우리는 오로지 상황의 압력과 자기 보존 본능때문에 가축 떼처럼 똘똘 뭉쳐 우글우글 몰려 있는 것일 뿐이며, 그런 식의 연대 의식에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의심스러워졌다. 그리고 우리 검정 표지 집단이 예전의 그 강당에 모여 있던 집단과 똑같이, 아니 어쩌면 이 세상 모든 집단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몰아낼 수 있다(유배 보내고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 236~239쪽
    그는 답했다. 물론 우리는 민속 예술이라는 유산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할 일 앞에는 드넓은 지평선이 열려 있다. 저속한 음악 문화, 부르주아가 사람들에게 주입한 저 진부하고 시시한 유행가 일색의 통속 문화를 정화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본래의 인민 예술로 대체하는 일이 우리가 할 일이다.
    묘한 일이다. 루드비크가 그때 말한 것은 가장 보수적인 모라비아 민족주의자들이 오래도록 꿈꾸었던 유토피아였던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신이 부재하는 도시 문화의 타락에 대해 목청을 높여 비판했었다. 
......
    루드비크의 말을 들으며 우리의 감정은 감탄과 반감이 뒤섞였다. 그가 너무 자신만만한 것이 거슬렸다. 그는 그 시절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과시하고 다니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미래 자체와 어떤 비밀 협약을 맺어 그 이름으로 행동할 위임장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생각들은 가장 깊숙이 감추어진 우리의 꿈과 만나고 있었다. 그 생각들은 갑자기 우리를 위대한 역사의 차원으로 높이 올려놓고 있었다.
    ......재즈가 그랬던 것처럼, 원래 특성을 견지하면서, 자기 고유의 멜로디와 리듬을 유지하면서, 우리 음악은 늘 새롭게 변화하는 자기 스타일의 양상을 발견해야만 한다. 어려운 일이다. 막중한 과업이다. 오로지 사회주의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일이다.
    사회주의가 거기 왜 들어가는데? 우리가 항변했다.
    그는 우리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 241쪽
...... 공산주의 정부는 새로운 연주단을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바이올린, 침발롬 등 민속 음악이 매일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왔다. 모라비아 노래들이 대학과 노동절 축제, 젊은이들의 댄스 파티, 공식 연회를 휩쓸었다. 재즈는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을 뿐만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와 그 퇴폐적 취향들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젊은이들은 부기우기나 탱고를 내버리고,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합창을 하며 원무를 추게 되었다. 공산당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하고자 애썼다. 그들은 스탈린이 새로운 예술에 대해서 내린 그 유명한 정의, 즉 민족적 형식 속에 담긴 사회주의적 내용이라는 정의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음악, 우리 춤, 우리 시에 이 민족적 형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민속 예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264쪽
    그 생각을 하면 나는 아직도 괴롭다. 우리가 뒤를 돌아보기를 고집한다면 롯의 아내와 같은 종말을 맞으리라고 위협한 사람이 누구였던가? 민속 음악에서 이 시대의 새로운 스타일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또 이 민속 음악을 움직이게 하여 우리 시대의 역사와 나란히 행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우리를 고무했던 사람이 누구였단 말인가?
    그 모든 게 다 유토피아라고 루드비크는 말했다.
    뭐, 유토피아? 이 노래들이! 이 노래들은 지금 존재해!
    그는 내게 조소를 보냈다. 너희 악단이나 그 노래들을 하지. 하지만 악단 밖에서 그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하나라도 대 봐! 그저 집단 농장을 찬양하기만 하는 그 뻔한 노래들을 좋아서 부르고 있는 집단 농장원이 있으면 하나만 데려와 봐! 하도 가짜로 꾸며 놓아 인상을 찌푸리고 말걸! 그 선전 문구들은 마치 비뚤어진 옷깃처럼 사이비 민속 음악에서 튀어나와 있을 뿐이야! 푸치크에 대한 모라비아풍 비슷한 노래라니! 참 모두가 웃을 이야기지! 프라하의 기자가, 대체 그 사람이 모라비아하고 무슨 공통점이 있다는 거야?
    푸치크는 모두에게 속하며 우리에게 역시 우리식으로 그를 노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나는 반박했다.
    우리식으로라고? 너희는 공산당 선동-선전 방식으로 노래하는 거지 우리식으로 하는 게 전혀 아니야! 가사만 해도 그렇잖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푸치크에 관한 노래야? 저항 운동을 한 사람이 그 사람밖에 없나?......
 
- 268~269쪽
    그의 친구들이 겪었던 일을 내게 언급했던 것과 이 부탁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했다. 나는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루드비크는 겁이 나서 이야기를 멈추었던 것이 아닌가! 우리의 토론이 누설될까 겁을 먹고 있었다니! 고발당할까 봐 두려웠다니! 내가 두려웠다니! 끔찍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또 한 번 ---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다. 너무도 깊어서 우리가 이야기 한번 제대로 나누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 왜 같은 한 번인데 띄어쓰기가 다르지? 한번, 한 번? 횟수를 나타낼 때는 띄어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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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한번) 이럴 때 띄어 써요

한국어 바로 알고 쓰기 | 띄어쓰기가 까다로운 '한번'과 '한 번'은 문맥에 따라 띄어쓰기가 다릅니다. 자세히 볼까요? ㅇ '한 번' 이럴 때 띄어요. 횟수를 나타내는 경우에는 띄어 써요. - 한 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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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4쪽

    ......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벌써 열 번쯤은 스스로 변호를 했어도 별 효과가 없었는데, 제마네크가 방금 푸치크의 그 고통들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내 몇 마디 문장을 휙 읽어 나간 지금 내가 스스로를 변호해 본들 무슨 효과가 있을 것인가? 그래도 일어나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이 엽서는 그저 장난으로 쓴 것일 뿐이라고 해명을 하면서, 그래도 그 농담의 문구들이 온당하지 못하고 몰상식하며 상스럽다는 것을 인정하고 비판하였으며, 나의 개인주의, '지식인'의 흔적, 인민과의 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내 허영심, 회의적 성향, 냉소주의를 다 드러내 보이기도 했으나,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에 헌신해 왔지 결코 당의 적이 아니라고 맹세했다. 그다음 벌어진 토론에서 동료들은 내 시각이 모순적이라고 반박했다. 스스로 냉소적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어떻게 당에 헌신적일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들어왔다. 한 여자 학우가 외설스러운 말 몇 마디를 내게 상기시키면서, 공산당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이 용납될 만하다고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도 프티 부르주아의 정신에 대하여 온갖 추상적인 언급들을 늘어놓으며 나를 그 구체적인 예로 삼았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나의 자아비판이 심도 있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  6부 코스트카 354쪽

    1948년 2월 혁명 전에는 공산당원들이 내 기독교 신앙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들은 내가 복음서의 사회적 내용을 설명하고, 재물과 전쟁의 참화 아래 무너재 내린 그 벌레 먹은 구 세계를 통렬히 비판하고, 기독교 정신과 공산주의의 유사성을 밝혀내고 하는 것을 즐겨 들었다. 그들에게는 가능한 한 가장 폭넓은 층을, 그러니까 신자들까지 자기네 쪽으로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러나 2월 혁명 후에는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교로서, 부모들의 정치적 사상 때문에 학교에서 추방당할 위험에 처한 몇몇 학생들을 옹호하게 되었다. 이런 항변은 학교 당국과의 충돌이라는 결과를 내게 안겨 주었다. 그렇게 종교적 신념이 분명한 사람이 과연 사회주의 젊은이들을 교육할 수 있겠느냐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 캡쳐해 둔 내용 옮기는 정도의 후기인데도 쓰기 힘드네. 후기 쓰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 6부 코스트카  398~400쪽

    ...... 나의 회의가 우리 사이에 가로놓였다. 내가 루치에에게 줬던 정신적 도움이 이제 그 정체를 드러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은 그녀가 처음 내 앞에 나타났던 그 순간부터 이미 나는 그녀를 육체적으로 원했다는 느낌. 위로의 말을 하는 사제로 변장하고서 실은 여자를 유혹하는 사람같이 행동했다는 느낌. 예수님과 하느님에 대한 그 모든 훌륭한 설교들이 오로지 가장 저열한 육체적 욕망을 감추는 겉옷에 지나지 않았다는 느낌. 그때 내가 성욕을 자제하지 못함으로써, 나는 맨 처음 내 의도의 순수성을 더럽힌 것이고 하느님 앞에 너무도 부끄러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곧 내 사고는 저 혼자 빙그르르 돌았다. 나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하느님께 합당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것, 하느님 마음에 들고 싶어 하는 것은 얼마나 자만에 차고 교만한 일이란 말인가! 인간의 공적이란 그분 앞에서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루치에는 나를 사랑하며 그녀의 건강은 내 사랑에 달려 있지 않은가! 나 자신의 순수성만을 염려하며 그녀를 절망 속으로 내던져야 하는가? 그럼으로써 오히려 하느님의 경멸을 이끌어 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리고 또 만일 나의 이 열정이 죄라면, 무엇이 더 중요한가, 루치에의 삶인가 아니면 나의 결백인가? 어쨌든 그것은 나의 죄가 될 것이며, 나 혼자서 그것을 짊어질 것이며, 그 죄는 오로지 나만을 파멸시키리라!

-> 역겨워

......

    부당하다고요, 루드비크? 그래요. 이 일이나 다른 비슷한 일들 이야기를 들을 때 당신이 제일 많이 한 말이 바로 이 단어지요. 하지만 나는 부당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만일 인간사에서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면, 어떤 행위들이 그 행위자가 부여한 의미 외에 다른 영향력을 갖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부당함이라는 개념은 합당한 것일 수 있을 테고, 또 나도 그렇게 열심히 일한 국영 농장에서 쫓겨났으니 그 말을 사용할 자격이 있겠지요. 어쩌면 이런 부당함을 고발하는 행진이라도 벌이고 대단할 것도 없는 나의 이 인권 보호를 위해 열렬히 투쟁하는 것이 논리적일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어떤 사건은 그 사건을 만든 장님들의 생각 속에서와는 다른 어떤 의미를 내포하게 마련이지요.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다름 아니라 하늘에서 변장시켜 내려 보낸 지시이며, 그 사건이 이루어지도록 만든 사람들은 전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로 그 지고의 의지를 전하는 전달자일 뿐입니다.

-> 기독교가 체제 순응하게 만드는 논리가 이런 것일까? 그러면서 기독교는 저항의 역사도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 소극적 반항? 뭐 그런 게 기독교적 특성인가? 그렇다면 사실 나도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지. 체제를 뒤엎을 용기는 없지만 체제에서 순응하는 척 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만 속으로는 전혀 순응하지 않고 있는. 내가 기독교에 유독 가혹한 게 자기혐오인가?

    나는 확신했다. 바로 그런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농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안도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거기에서 나는 분명한 교시를 알아보았다. 너무 늦기 전에 루치에로부터 떠나거라. 너의 사명은 완수되었다. 그 열매는 네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네 길은 다른 곳에 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 년 전 자연과학대학에서같이 행동했다. 눈물을 흘리는, 절망에 빠진 루치에에게 작별을 고하고, 임박한 재앙을 내가 먼저 앞질러간 것이다. 나는 자진해서 국영 농장을 떠나겠노라고 했다....

 

#  6부 코스트카  412~413쪽

...... 이런 일은 내가 살아오는 동안에 자주 일어난 일이 아니었지만, 하여간 이 아가씨는 나를 사랑했다. 나는 그녀 인생을 내 손 안에 쥐고 있었다. 그녀에 대하여 이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현듯 나는, 내가 이른바 그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실은 나 자신의 인간적 책무들을 면하기 위한 핑계로 내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여자들이 무섭다. 그들의 온기가 두렵다. 끊임없이 곁에 있는 것이 겁난다. 이웃 도시의 그 여선생과 방 두 개짜리 집을 계속 나누어 쓴다고 생각하면 끔찍한 것과 똑같이, 루치에와 같이 산다는 생각을 했을 때 겁이 났던 것이다. 

    그리고 십오 년 전에 나는 왜 자발적으로 대학을 떠났는가? 나는 나보다 여섯 살 위인 내 아내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도, 그녀의 얼굴 모습도, 늘 반복되는 가정의 시곗바늘 같은 일상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은 그녀와 같이 살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녀는 착했고 내게 전혀 잘못한 일도 없었으므로 갑자기 비수를 들이대듯 이혼하자고 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었다. 그때 갑자기 축복과도 같은 숭고한 부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수님이 나에게 그 올가미들을 떠나라고 격려해 주시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오, 주님, 진정 이런 것인가요? 저는 그토록 한심하게 형편없는 놈인가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세요! 그런 믿음을 주세요! 오, 하느님, 당신의 음성이 들리게 해 주소서. 더 크게, 더 크게! 이렇게 온통 뒤섞인 수많은 목소리들 속에서 저는 당신의 음성을 전혀 들을 수가 없습니다!

 

# 7부 루드비크, 헬레나, 야로슬라프, 491쪽

...... 그렇다. 내가 제마네크 앞으로 나아가 그의 따귀를 때렸어야 했던 것은 바로 그때, 대학 강당에서, 제마네크가 <교수대 아래에서 쓴 르포>를 낭독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때였고 오로지 그때뿐이었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 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 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자동 보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움직인다.)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예전의 얀이 아닌 다른 얀이 역시 예전의 제마네크가 아닌 다른 제마네크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내가 그에게 날려야 하는 따귀는 다시 되살릴 수도 다시 복구할 수도 없이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 493쪽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 후기가 너무 길었다. 캡쳐한 부분을 옮겨 쓸 게 너무 많았다. 다시 읽으면서 이걸 왜 캡쳐했지? 하면 굳이 옮기지 않을텐데 다시 읽어도 기록해두고 싶어서 다 옮겼다. 올해 안에 밀란 쿤데라 다른 작품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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