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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 거리/책 읽기

[책] 백년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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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저자(글) · 조구호 번역
민음사 · 2000년 01월 05일
 

 
 
- 민음사 유투브에서 책 소개를 들었을 때는 좀 더 마술적인(?)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읽어보니 부엔디아 집안의 이야기를 통해 콜롬비아 근현대사(?) 역사를 응축시켜놓은 책이었다. 콜롬비아 근현대사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개화기나 한국전쟁, 노동운동 등등이 떠올랐다. 우리나라의 어느 집안을 가지고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는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  게다가 표현들도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판소리(?) 만담(?) 전래동화(?)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부엔디아 집안의 며느리인 페르난다가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하는데 문장에 마침표를 찍지 않고 몇 쪽을 넘어가는 호흡의 한 문장이라든지, 실제로 일어난 일이긴 한데 표현을 비현실적이게 과장한다던지 하는 부분이 우리 옛날 이야기가 이런 식이지 않나 싶었다. 
- 마술적 사실주의 라고 하는게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특징인가 보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도 비슷한 특징이 보였으니까. (그런데 민음사 너무 일 대충 한 거 아닌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과 백년의 고독 2권의 표지에 실린 그림이 같은 그림이던데.)
 
- 나는 장편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읽은 장편소설은 한강과 태백산맥 정도다. 이 책도 태백산맥 같이 길지는 않지만 1,2권으로 나뉘어 있으니 장편이긴 한데 읽으면서 지루하지 않았다. 물론 엄청 재밌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 흥미를 유지할 정도의 재미는 있었다.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콜롬비아, 라틴 아메리카의 소설은 어떤가 궁금하면 읽기 좋은 책인 것 같다. 게다가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니 읽으면 생색내기도 좋고 ㅎ

 
- 같은 이름이 계속 나와서 인물들이 헷갈린다. 책 앞쪽에 실린 가계도를 수시로 다시 봤다.
 
### 책 속에서
# 뒷표지
- Cien años de soledad
- 198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
- <마술적 리얼리즘>의 창시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대표작
- 소설의 종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동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의 작가들에게 이러한 말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 밀란 쿤데라 (지금은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 연결성 무엇?)
-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중요한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빈곤한 계층과 약자들의 편에 서서 서구의 경제적 착취와 국내의 압제에 강력하게 대항하고 있다. - 노벨 재단
 
# 2권(?) 64쪽
- <자유파들과 보수파들의 유일한 차이점은 말이야. 자유파들은 다섯시 미사를 드리러 가고, 보수파들은 여덟시 미사를 드리러 간다는 것뿐이야>
 
# 2권 141쪽
- 사실, 메메는 이미 수녀원 쇠창살 문 안에 들어선 다음 그 서류에 서명했는데 어머니에게 끌려왔을 때도 그랬다시피 별 관심 없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는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가 암탉들을 훔치려고 뒤뜰로 숨어들었으리라는 얘기를 전혀 믿지 않았던 것처럼 내심 그 증거들의 신빙성을 믿지 않았지만, 아무튼, 아내가 제시한 위 두 가지 궁색한 변명은 그의 양심의 가책을 완화시키는 데 소용되었으며, 그래서 그는 별 고민도 하지 않은 채 뻬뜨라 꼬떼스의 그늘로 되돌아갔고, 그곳에서 다시 요란법석한 파티와 그 엄청난 먹어치우기 행사를 재개했다.
-> 이 부분 읽으면서 사회적 갈등에서 자기 편한 쪽의 해석을 믿는 척 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나 포함)의 모습이 보였다.
-> 근친상간에 대한 해석을 읽고 나서 이 부분을 다시 보니 부엔디아 집안에서 근친상간으로 태어나지 않은 메메의 아이를 페르난다가 숨겨서 키웠기(?) 때문에 이 아이가 이모와 근친상간을 하게 되고 그 비극으로 돼지꼬리 아이가 태어났네.

 
# 2권 309쪽, 마꼰도와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에 대한 탐구
- 2 마술적 사실주의 : 또다른 리얼리즘의 극치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심도 있게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방법을 모색하던 라틴아메리카 소설가들은 역사적.문학적으로 큰 혼란을 겪어온 라틴아메리카만의 독특한 문학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마술적 사실주의 Realismo Magico>라는 독특한 방법을 고안해 냈다. 
-> 우리가 해학이라고 부르는 게 이거 비슷한가? 비참한 현실을 현실 그대로 표현하면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또는 표현의 자유가 온전히 보장되지 않는 사회적 억압 속에서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슬쩍슬쩍 사실을 집어 넣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양반 사회에서 양반을 놀리는 게 가능했던 것이 마당놀이? 같은 거잖아? 유머라고 해야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지만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 이야기.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이것저것이 떠오르긴 했다. 지금 후기를 쓰면서도 그렇고. 
 
# 310쪽
    ... <마술적 사실주의>는 사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가 초현실주의적 수법으로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좁게는 리얼리즘의 한 유형, 넓게는 세계 인식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충분히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현실을 실제의 삶보다 더욱 폭넓게 수용하고 있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현실>이란 개인 심리적.사회적.수평적.역사적.외면적 측면뿐 아니라 집단 심리적.민화적.미신적.환상적.추상적.수직적.탈시간적.내면적 측면까지 포함한다. 바꾸어 말하면, 죽음의 세계는 삶의 세계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며, 부재와 현존은 한 사물이나 현상의 동시적 속성이며, 환상과 실제 사이에는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현실은 불가시적 세계로 둘러싸인 포괄적인 전체를 뜻하기 때문에 소설 속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일상적인 것을 환상적으로, 환상적인 것을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문체와 서사적 관점을 교묘하게 조합함으로써 허구적 세계의 실제적 요소들을 환상적 요소들과 융합시키고 있기 때문에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자신의 소설에 첨가한 이런 신화적인 요소들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 즉 고독을 치유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이해될 수 있다.
-> 이 책에서도 죽은 사람이 완전히 죽은 사람이 아닌 경우가 나온다. 라틴 아메리카 문화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경계가 불분명한 것 같다. 지금까지 읽은 이쪽 문학작품들에 다 이런 요소가 있다.
 
# 312쪽
    또한 바나나 농장 노동자들이 노동 조건과 생존권 문제를 놓고 벌였던 시위의 진압 과정에서 실제로는 13명이 죽은 사실을 3천 명이 죽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런 과장에 대해 백년 후에는 3천 명이라는 환상적 숫자가 역사적 숫자로 믿어지고 13명이라는 역사적 숫자는 믿기 어려운 환상적 숫자로 퇴색할 것인바, 그때는 사람들이 역사보다는 자기 픽션을 믿을 것이라고 말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그 사실과 유사한 이미지들을 통해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영역으로 이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 323쪽
    이처럼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는 근친 상간과 더불어 시작되고 혈통의 미로를 통해 여러 세대에 걸친 모색 후 그 순환이 완성되는바, 결국 돼지꼬리 달린 아이와 거울로 이루어진 도시의 파괴는 인간이 꿈꾼 유토피아는 인간 자체 내에 지닌 악의 씨로 말미암아 성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마꼰도는 서양 세계와의 진정한 족외혼적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시도에서 번번히 실패하고서 수세기 전부터 지속된 고독 속에 갇힌채 아직까지도 확실하고 완전하게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근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
 
# 324쪽
    ... 즉 <백년의 고독>은 <우리의 현실을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갈수록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수록 우리를 덜 자유스럽게 하며, 갈수록 고독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할 뿐>인 상황하에서 <삶의 새롭고 활짝 개인 유토피아이며, 아무도 타인을 위해 심지어는 어떻게 죽어야 한다고까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곳이며, 정말로 사랑이 확실하고 행복이 가능한 곳이고, 백년의 고독을 선고받은 가족들이 마침내, 그리고 영원히 이 지구상에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곳>인 진정한 유토피아를 창조하는 작업을 실행하기에 늦지 않았다고 믿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결과물, 즉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을 타파하기 위한 지난한 시도인 것이다. 
-> 이 부분을 쓴 사람이 번역가가 맞다면 번역가 자체도 말을 좀 장황하게 쓰는 편이네. 마르케스의 문장이 원래 그렇더라도 이 감상문을 쓴 사람도 문장이 너무 장황해. 짧은 문장이 읽기 편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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