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우비평판 세계문학선-16-01
생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저 / 강두식 역 | 범우사 | 1999년 12월 31일
- 내가 읽은 책이랑 표지가 다른데, 번역가가 같으니 같은 책이지 않을까 싶다.
- 작가 이름도 익숙하고 책의 제목도 익숙하다. 아마도 그래서 그렇게 재밌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이 책의 주인공 같은 여성이 기존 소설의 여성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을 가졌을텐데 나는 이미 다른 독특하고 파격적인 다른 여성 주인공을 많이 소비한 상태라 이 여성이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진 않았다.
- 초반부는 좀 지루해서 그만 읽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읽는데 어려움이 있을 정도의 지루함은 아니라 참고 읽었더니 중반부부터는 좀 재밌어졌고 후반부는 더 읽기 괜찮았다.
- 초반부의 지루함은 이 남자 늙고 소심한 스토커잖아 하는 생각이 들게 한 슈타인의 일기 탓이었다. 니나도 어린 나이이기도 했고.
- 좀 재밌는데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중간에 니나가 쓴 소설, 친위대를 구해주는 니나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읽으면서였다. 그러면서 니나가 구원자 컴플렉스?가 있는 인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폐결핵에 걸린 신학생(?)의 키스를 받아주는 일이라든가 결혼하면 안 될 것 같은 남자랑 결혼을 한다거나 스토커같은 슈타인에게 결혼을 한다면 당신과 하겠다던가 하는 말을 하는 게 그런 니나의 구원자적인 면모에서 왔다는 것을 나중에 해설 부분을 읽으면서 확실해졌다. 니나의 슈타인에 대한 태도나 슈타인이 니나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왜 이러지? 하는 짜증이 났었는데 슈타인은 니나의 구원자적인 면모를 보면서 자신도 그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싫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받고 싶었지 구원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 계속 욕망하면서 주저했나보다 하는 생각을 해설을 보면서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슈타인은 니나에게 어떤 측면에서는 구원자였네 하는 생각도 드네. 니나도 슈타인을 구원했지만 니나도 슈타인에게 구원받지 않았나? 최소한 육체적으로는. 슈타인은 아마도 정신적인 구원을 받은 거겠지?
- 해설 부분에서 이 작가가 카톨릭에 기반을 둔 사람이라고 나와 있어서 소설을 읽으면서 이 사람 뭐지? 하는 부분이 어느 정도 수용되었다.
- 지금의 나에겐 그렇게 흥미로운 소설은 아니었지만 초반부의 지루함을 넘긴다면 읽을 만한 책이었다. 하지만 루이제 린저의 다른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번역이 70년대였나 오래된 책이라 새로운 번역본으로 읽으면 다를 수도 있겠다. 번역가가 슈타인에게 공감하던데 왜? 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번역가의 글이 처음에 있어서 초반부 스토커 같은 태도의 슈타인의 일기를 읽으면서 번역가가 남자라서 슈타인에 공감하나? 왜?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 책이 크고 두께도 있는 편이다. 지하철에서 들고 읽기에는 조금 무게가 있는 책이었다.
- 나는 읽기 시작해서 다 읽었는데 다른 재밌는 책이 많다면 굳이 읽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 9쪽
나는 카뮈의 <페스트> 주인공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을 살아가는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떤 형태가 옳고 어떤 형태가 그른가는 인간이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나로서는 슈타인의 지성과 인내와 겸허와 봉사 정신과 충실을 높이 평가하고 싶을 뿐이다.
1976년
옮 긴 이
-> 역자 후기가 책의 앞쪽에 있어서 이 부분을 먼저 읽었는데, 역시 책을 먼저 읽고 나서 다른 사람의 평가 또는 해설을 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초반부에는 특히, 이런 슈타인에 공감한다고???? 하면서 물음표를 수없이 가지면서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슈타인을 높이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하겠다. 내가 여자라서 그럴까? 남자가 아니어서? 후기를 쓰려고 이 부분을 옮기다 보니 다음엔 <페스트>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192~193쪽
.....그것은 다른 여학생 하나가 그 순간에, 병든 동물들은 전체 가축에 전염시키지 않으려고 죽일 수 있다고 얘기를 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의견이 분분해지고 불꽃을 튀기게 되었다고 한다. 즉 인간을 동물과 같은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불치의 정신병 환자도 인간인가, 아닌가, 혹은 살해와 똑같이 환자의 격리 조치로도 이 사회를 잘 보호할 수 있는데도 사회가 인간의 살해를 요구할 수 있는가, 등등의 문제가 토론되었다는 것이다. 두세 명이 니나의 편을 들어 불치의 정신병 환자가 그래도 인간인가 아니면 이미 인간이 아닌가 하는 것을 확인할 수는 없다. 더구나 불치라는 개념은 대단히 애매하다. 진단에도 오진이란 게 있고 치료법도 진보를 했다. 지금까지 불치라고 생각되고 있던 케이스도 치료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라고 우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 즉 니나는 정신병과 비정상의 한계선은 거의 그을 수가 없으며, 건강한 반사회적인 인간이 있는 반면에 그래도 자기들이 하는 일을 가지고 사회를 위해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는 불치의 환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는 것이다. 그 말에 누가 말하기를, 바로 그런 건강한 반사회적인 인간을 없애야만 한다. 민족은 그들을, 그런 자와 정신병자들을 제물로 바쳐야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니나는 그렇다면 당신은 횔덜린도 죽였을 거예요, 안 그래요? 하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니나는 완전히 자제력을 잃고 복도가 울릴 정도로 악을 썼다는 것이다. 그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위자가 누구란 말이냐? 당신과 같이 아무런 회의도 안 하는 인간들은 살인을, 살인이라는 것을 어떤 경우에도 그리고 언제까지도 이해 못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합법적인 탈을 쓰고 살인을 하기 시작한 당신과 같은 인간들은 계속 살인을 하게 될 것이고 정당하건 안하건 상관도 하지 않고 마구 죽여서 마지막에는 그저 살인자만이 잔뜩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계속 반대하겠다. 절대로 중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살인을 허용하는 국가를 - 설사 필요하고 선한 탈을 쓰고 있다고 해도 - 그런 국가를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대들었다고 한다.
->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생각이 났다. 다섯째 아이를 제외한 가족의 평안을 위해서 다섯째 아이를 죽이는 일을 허용할 수 있는가? 그런 가족에게 평안이 찾아올까? 평안이 온다면 그 선택은 옳은 것이었을까? 아마도 이 부분의 토론 내용은 나치와 관련 있을 것 같은데, 다섯째 아이 생각이 나는 것 보면 다섯째 아이의 내용도 가정에서 일어났을 뿐이지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유사성이 있는 것인가? 사회(집단)와 개인이라는 두 존재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문제인가? 그 양상이 어떨 때는 심하게 드러나고 어떨 때는 눈 감아줄 정도이고?
...... 나는 니나한테 조심하고 그런 충돌은 피하도록 하라고 충고했다. 나는 그런 어려운 문제는 언제 조용히 나와 토론을 해보자고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을 것을 보장해야 된다고 했다. 니나는 의아스러운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제가 입을 봉하고 있을 수가 있지요?......
# 205~206쪽
...... 그러나 니나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선생님은, 하고 니나는 물었다. 절대 동정심에서 병자를 죽이진 않으시겠군요? 그것은 쉽사리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질문은 아닌데, 하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덧붙였다. 만일 병자가 자기는 불치의 병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고, 산다는 것 자체가 자기를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면, 그런 생각의 결정적인 점은 죽음을 통해서 그에게 주어지는 여생이 생물학적인 현세의 생명보다도 더욱 높은 가치가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안락사도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말도 했다. 즉 무가치한 생명, 예를 들어서 불치의 정신병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사람을 희생시킴으로써 보다 큰 공동체 같은 것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가정할 때는 안락사도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얘기를 끝내기도 전에 니나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펄쩍 뛰었다. 선생님도 희생이니 공동체 같은 개념을 사용하시는군요. 그건 제법 납득할 수 있을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 병든 사람들을 전체 민족을 위해서 없앤다는 말이지요. 다른 인간을 위해서 인간들을 희생시킨다는 것이군요. 어떤 사람은 가치가 없고 어떤 사람은 가치가 있다고 할 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럼 그 척도가 무엇인지 말씀해보세요. 집단을 위한 인간의 유용성 여부인가요? 저로서는 그런 척도는 존재하지 않아요. 절대로 존재하지 않아요. 어떤 인간이건 자기 나름대로 그 가치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희생을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들은 가치가 있단 말인가요? 그들은 아마 생물학적으로는 건강하겠지요. 그렇다고 그들이 가치가 있나요. 한 건강한 육체 속에는...... 네, 저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걸 믿지 않아요. 그리고 도대체 절대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가치, 무가치를 판단하려고 드는 사람이 누구지요? 그건 정말 잘못 생각한 미친 수작이에요. 마치 언젠가는 병을 근절해버릴 수도 있다는 듯이 생각하다니 틀린 생각이에요. 언제나 병은 있게 마련이고 언제나 건강과 병은 서로 균형을 이루고 존재할 거예요. 그리고 의학의 그런 생물학적인 입장은 틀렸어요. 완전히 잘못돼 있어요.
니나는 활활 타는 듯한 분노의 말투로 얘기를 했다. 나는 니나에게 해명을 하기 위해 여러 번 얘기를 중단시키려고 했다. 의학이란 것도 다른 모든 학문과 같이 변천을 하는 것이며 지금까지도 이미 의사가 생명에 대한 살해 권한을 갖고 있었다는 것, 예를 들어 모체를 구하기 위해 태아를 죽이는 것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해명을 하려고 했다. 그리고 어쩌면 -- 그런 문제를 놓고 생각할 때는 객관적이어야 된다 -- 일명 살해도 허용법을, 개혁이나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니나는 소리를 쳤던 것이다. 아니에요. 결코 파기되어서는 안될 선입관이란 것이 존재해요. 그리고 선생님도 이 문제에 있어서 객관적이어서는 안 돼요. 선생님은 저보다도 현명하고 아는 것도 많으세요. 그러니까 확실히 외관상으로는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또 선생님 나름대로 사실이 정당할 수도 있겠지요. 선생님은 과학자니까 말예요. 하지만 저는 그 모든 것이 암만해도 그릇된 견해라고 느껴요. 우리는 그런 견해를 가지고 무서운 잘못을 저지르게 될지도 모르고 또.......
# 358쪽, 작가론
적극적인 삶의 작가 루이제 린저, 홍경호(한양대 교수)
# 366쪽
이러한 주제 때문에 비평가들은 린저를 카톨릭 작가나 여류 작가로 간단하게 규정해버리고 말게 되는데, 그것은 이 작가가 다룬 대상이 인간이 갖는 가장 보편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 367쪽
이 작품의 주제는 여성을 통한 남성의 구원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또한 사랑이 갖는 일원적인 승화로 볼 수가 있으며, 남성이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 것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남성이 자신의 새 존재를 느낄 때, 거기서 얻어지는 개체의 존재 의식이야말로 모든 여인들에게 보다 참된 애정관과 생활관을 제시해 줄 수가 있다.
# 373쪽
...... 그러므로 인간은 그 삶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내부에서 용해시켜 외부로 확산시켜나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의무이자 구원을 받는 길이라고 이 작가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명은 결코 남성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이 작가가 벌이고 있는 사회 활동이나 작중 여주인공들의 적극적 삶은 모두가 이러한 신념에서 비롯되는 행동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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