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의 파생독서로 읽었음.
- 가난이라는 말에 꽂혀서, 예전에 어디선가(아마도 트위터)에서 봤던 글귀를 직접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 내가 읽었던 글귀는 도둑 맞은 가난의 마지막 부분에 있던 내용인 것 같음
"나는 우리 집안의 몰락 과정을 통해 부자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운가를 알고 있는 터였다. 아흔아홉 냥 가진 놈이 한 냥을 탐내는 성미를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해 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 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 도둑 맞은 가난은 짧은 단편이었음. 박완서 단편집 모음의 제목이 도둑 맞은 가난이었음.
-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는데 문장이, 표현이 충격? 감탄? 충격에 더 가까운 것 같음.
- 20대 중반 이후로는 소설은 더이상 재미 없어 하면서 거의 읽지 않았음. 지식 습득을 위한 책들만 계속(그것도 가끔) 읽다가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니 문장들이 어찌나 생경한지, 이런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고?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고? 소설가들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음.
- 특히나 처음 읽은 도둑 맞은 가난의 멸치 대가리 눈깔에 대한 묘사가 충격적이었음. 나도 국에 들어있는 멸치 싫어하고 어릴 때는 억지로 먹던 사람인데, 누구나 흔하게 겪었을 내용을 소설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이런 식으로 녹여낸다고? 소설가들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보는 것과 관찰이 다르다는 것은 알았지만 소설가의 관찰과 과학자(이과)의 관찰은 얼마나 또 다른 것인지도 느껴졌음.
-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는데 좋았음. 출퇴근 시간에 단편소설 읽는 것도 아주 좋았음. 단편이라 호흡이 길지 않으니까 출퇴근 시간 짬짬이 읽기 좋았고, 짧은 단편을 단숨에 읽는 것보다 중간중간 지하철 내리고 환승하고 퇴근까지 기다렸다 다음을 읽고 하니, 책을 읽지 않는 동안에 책 내용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다른 생각도 하고 생각이란 걸 여럿 하게 해줬음.
- 어릴 때는 뒤의 내용이 궁금해서 안달했었는데 이것도 나이 때문인가 뒤의 내용도 궁금하지만 읽은 내용을 곱씹어보고 뒤의 내용을 추측해보고 내용과 관련된 다른 생각을 하고 지금의 현실과 비교도 하고 하는 짧은 시간들이 책을 더 재밌게 해줬음.
- 출퇴근시간을 위해 단편소설집을 계속 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
- 단편집에 있는 소설들 다 좋았음. 읽을 때는 다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잊었음. 그래서 처음 소설(도둑 맞은 가난)과 마지막 소설(해산바가지)에 대한 감상만 남았음.
- 해산바가지는 책 내용에 대한 것보다 시대가 얼마나 변했는지, 수십년이 지나니 수십년 전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누군가에겐 남아있겠지만) 대중적으로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게 된 시대의 변화가 제일 인상 깊었음.
- 세상은 변하고 나도 변함
- 내가 변했다는 걸 느낀 건, 아마도 고등학교 때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다가 책을 집어던지던(이러면 안 됨) 내가, 지금은 해산바가지를 읽으면서 '그 시절에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지'하는 걸로 넘기고 '그런데 지금은 세상이 다르네'라는 위안으로 부글거리지 않으면서 책을 읽었다는 점이었음. 읽다가 집어던져서 여자의 일생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데 아마도 그 시대 여자를 묘사했을테고 그 내용이 청소년기 나에게는 '이런 게 여자의 일생이라니 말도 안돼' 라는 생각이 들게 해서 분노했었을 것임. 그런데 지금 읽으면 다르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시대상의 반영이고 그렇게 살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었을텐데 그때의 나는 그런 여자들의 묘사를 읽는 것조차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미숙(?)하지 않았나 싶음.
그렇다고 이제와서 여자의 일생을 읽을 생각은 없음.
-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에 중고서점에 들어가서 제목에 이끌려 책을 고르고, 그 책을 읽고나서 이런 저런 책들을 또 읽고, 그렇게 읽은 책이 좋아서 또 책을 읽으려는 나, 괜찮네. 교양인 같고 ㅎㅎㅎ
- 그동안 너무 교양 없이 살았던 것 같음. 요즘 어휘력도 많이 부족해지고.
- 초등학교(국민학교였지만) 시절에는 우리 학교 독서실을 독차지하면서 책을 읽었었는데 그때 기분이 되살아나는 것 같음.

- 정작 가난이라는 단어 때문에 시작한 독서인데 가난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네.
- 구글에 가난이라고 검색하면 저런 사진과 함께 가난의 정의가 나옴.

- 나는 이과지만 문과를 동경하는 이과에 가까웠고 문과 수업을 들을 기회도 꽤 있었는데 문과 수업을 들으면서 제일 적응 안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단어 하나의 정의를 가지고 한 학기동안 떠들 수 있는 여러 설들이 있다는 것이었음. 그리고 결론도 없이 그 한학기가 끝나는 것이었음. 알고보면 수백년의 설들이 (아니 수천년일까?) 있겠지?
- 그렇다고 해서 가난이라는 용어가 그런 용어는 아니라고 생각함. 누군가는 여전히 저 단어를 써야하는 상황에 있을텐데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치장하기 위한 표현으로 가난을 사용하는 건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함. 특히나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더 적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지.
- 나도 잘못 썼던 과거가 있고 앞으로도 잘못 쓸 수 있겠지만 이렇게 적어두면 더 조심하게 되겠지. 사실 가난 뿐만 아니라 수많은 말들을 잘못 쓰고 살겠지. 그래도 계속 생각하고 반성하고 노력하다보면 좀 더 제대로 된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겠지.
- 연관되는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원룸인 내 방에 다녀갔던 가족들이 '그런 방에서 어떻게 사냐, 나는 못 산다' 같은 말을 계속해서 얼마 전에 그럼 큰 방 구하게 돈을 달라고 했던 적이 있음. 저런 말을 더이상 못하게 하려고 한 말이었음. 나는 내 형편껏 살고 있는 건데 어떻게 사냐니. 그냥 사는 거지. 그럼 여기서 안 살면 어디서 살라고. 물론 가족은 내 걱정에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내 형편을 도와줄 게 아니라면 저런 말이 나에게 기분 나쁨 외에 뭘 줄 수 있는지.
- 그러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저런 말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음. 내가 수용할 수 없는 걸 수용하면서 사는 사람에게 함부로 말한 적 있었을 것 같음. 그걸 솔직함이라던지 그따위 말로 방어하면서.
- 하얀 거짓말이라는 게 왜 필요한지 나이 드니까 점점 알게 되네 ㅎ 어릴 때는 솔직한 게 옳은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하얀 거짓말보다는 침묵이 더 좋다고 생각하지만. 침묵 쪽이 더 편하기도 하고.
- 가난 생각을 하다보니 내 방에 대한 가족들의 감상이 생각났음. 내 생각에는 내 형편에 적당한 곳에서 나쁘지 않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물론 나도 더 좋은 환경을 추구하지만 그럴 사정이 안되면 타협하며 사는 거지.
- 벼락거지 같은 말 쓰는 기레기들 없어지면 좋겠음(응? 갑자기?). 남들이 돈을 번다고 내가 갑자기 거지가 된다니. 이런 말을 통용시키는데 일조하는 기레기들은 계속 지들이 기레기라는 걸 모를 거라서 소용 없을 테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쓴 일기장이 되었네 ㅎ
'놀 거리 > 책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 지고 강물 흘러, 이청준 (0) | 2024.01.03 |
---|---|
보수적인 투자자는 마음이 편하다, 필립 피셔 (1) | 2023.12.31 |
관악중앙도서관 상호대차 서비스 (1) | 2023.12.27 |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2) | 2023.12.23 |
하워드 막스, 투자와 마켓 사이클의 법칙 (0) | 2023.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