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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 거리/책 읽기

[책] 수많은 운명의 집, 슈테판 츠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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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민음사 유투브에서 봤나보다.
- 무슨 내용인지 모르고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도시 여행기인가? 하면서 읽었다. 읽다보니 여행기라 하기엔 내용이 여행보다는 도시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에 대한 얘기들이라 작가가 여행을 하면 이런 여행기를 쓰나보다 싶었다. 작가가 쓴 글들 중에서 발췌해서 엮은 책이라고 하니 여기 저기 돌아다니거나 지내면서 쓴 글들 중에 여행기라 할 수 있는 글들을 엮었나보다 싶다.
- 내용이(?) 좀 어렵다. 익숙하지 않은 지명이 많이 나오고 역사적 배경지식이 있어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내가 유럽 출신의 지식인이었다면 동의하거나 공감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엔 여행조차도 안 가봐서. 유럽 역사에 관심도 많지 않고.
- 제일 기억나는 부분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이다. 이 책을 읽고서 인터넷 검색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었다는 내용을 알았다. 오스트리아 왕위후계자를 다른 나라 사람이 암살했다던가 그래서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선포한 것이라고 봤다.
- 1910년대에는 전쟁에 대한 공포가 없던 시절이었나 보다. 다들 전쟁이라는 얘기에 흥분한 도시 사람들의 얘기를 보면서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전쟁의 참혹함, 피해, 상처, 고통을 반복해서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듣기 싫거나 잊고 싶어할텐데 그런 얘기를 더이상 하지 않고 그리고 전쟁과 갈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우리나라에도 언젠가 전쟁이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갈등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북의 지도자가 독재자 아닌가? 독재자들은 정치적으로 전쟁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고. 
- 1차 세계대전이 시작할 때는 흥분하고 열정적이었던 오스트리아 사람들도 2차 세계대전에서는 다른 반응이었다니 사람들은 각성을 하긴 하는데 그 각성이 너무 늦지 않으면 좋겠다.

- 이 책에서 여러 장을 캡쳐했다. 대부분 후반부 내용이다.


### 책 속에서

- 36~37쪽

... 영국의 위대한 수필가 찰스 램도 언젠가 방학 중에, 옥스퍼드에서 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과거여, 너 놀라운 마술사여,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것인 그대는 무엇인가? 그대가 존재했을 때, 그때 그대는 과거가 아니었다, 그때 그대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맹목적인 존경을 품고 과거를, 그대가 불렀던 그 과거를 돌아다보았고, 자신을 하찮고 무미건조하고 현대적이라 생각했다. 이런 유예 속에 어떤 비밀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머리 하나뿐인 야누스, 존경을 품고 영원히 뒤를 돌아보지만, 그런 존경으로 앞날은 볼 수 없는 한쪽 머리만 갖고 있는 야누스인가? 놀라운 미래,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과거, 아무것도 아닌 것, 그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다."

 

- 129쪽
1926
여행하기 혹은 여행당하기
 
  항구와 역, 그들은 나의 열정이다. 나는 이들 앞에 몇 시간이고 서서 기다릴 수 있다. 인간과 물건들을 가득 싣고 쏴쏴거리며 다가오는 새로운 물결이 이미 넘쳐흐른 물결 위를 또 다시 뒤덮을 때까지. 나는 신호들, 시각을 알리는 소리와 차편 여행의 신호들을, 고함과 소음을 사랑한다. 시끌벅적하고 먹먹하게, 하지만 긴밀하게 서로 뒤섞여 울리는 소리들. 모든 역은 서로 다르다. 또한 모든 역은 다른 먼 곳을 자신 안으로 불러들인다. 모든 항구, 모든 배는 다른 화물을 끌어들인다. 그들은 우리 도시들 안의 세계이며, 우리 일상 속의 다양성이다.
  이제 나는 다른 종류의 역들도 보았다. 파리에서 처음으로. 이 역들은 현관도 지붕도 없이 거리 한가운데에 있고 표지조차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밀물과 썰물처럼 차량이 오간다. 그곳은 어느 거대한 협회의 자동차 소재지이다. 이 자동차들이 언젠가 기차를 완전히 대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타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여행이 시작된다, 단체 여행, 계약에 의한 여행, 여행당하기 등. 아침 9시에 벌써 첫 번째 무리가 대로에서...
 
-131쪽
... 편안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모든 감각을 보고 즐기는 데에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잠자리나 점심 식사처럼 사소하지만 끊임없는 걱정거리에 방해받지 않으며, 기차 일정을 찾아볼 필요도 없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듯 뒤뚱거리며 잘못된 골목에 들어설 위험도 없으며, 자신을 놀리거나 속이는 사람도 피할 수 있고, 애써 외국어를 더듬거리며 말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감각은 오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각오만 하면 된다. 그리고 또 이 새로운 것들 역시 볼거리를 고려해서 수십 년간 불순물을 걸러 낸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그런 단체 여행에서 정말로 가장 중요한 것만을 본다. 사회에는 자신의 기끔을 숨김없이 다른 사람과 공유할 때에야 비로소 기쁨을 실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 게다가 이런 여행은 저렴하고 실용적이며 특히 편안하다. 그러므로 분명 미래의 여행 방식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발적인 여행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여행에 끌려다니게 되리라.
  하지만 상품화된 여행으로 인해 여행의 참된 비밀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아주 오랜 옛날부터 여행이라는 단어에는 모험과 위험, 변덕스러운 우연과 유혹적인 불확실성의 은은한 향기가 맴돌았다. 우리가 여행하는 까닭은 그저 먼 곳에 머물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로부터, 하루하루 규칙적인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그러니까 집을 떠나는 즐거움, 따라서 자기 자신이 아닐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다. 우리는 여행을 체험함으로써 단순히 안정되고 편안하게 살아가기를 잠시 중단하고자 한다. 그러나 저들, 수동적인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모르리라. 진정한 방랑자의 신, 즉 우연이 그들의 발걸음을 이끌지 않으면,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칠 터이므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그렇게 어떤 나라의 특별하고 사적인 것들을 전부 놓쳐 버리고 만다. 이 미국인들과 영국인들은 여전히 미국과 영국의 대중 자동차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들은 외국어를 듣지 못하며(어떤 만남도 없기 때문에) 그 민족의 특성과 풍습을 느끼지도 못한다. 그들은 분명히 볼거리를 본다. 하지만 매일 각기 차에 올라타는 스무 명 모두가 동일한 볼거리를 볼 따름이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것을 체험하고, 같은 사람이 동일하게 설명한 것을 통해서 알 뿐이다. 그 누구도 새로운 것을 깊이 알지 못한다. 절대 홀로 바라보지 않은 채, 스스로의 노력으로 경이로움을 경건히 끌어안지 못한 채, 단체 안에서, 쓸데없는 잡담과 대화 속에서 최고로 정선된 가치와 세계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여행을 마치고 그가 집에 가져가는 것은 이 교회, 저 그림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는 실용적인 자부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내적 교양과 문화적 확충이라기보다 오히려 스포츠의 기록 같은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여행을 하려면 차라리 불편함, 성가심, 불쾌함이 낫다. 이것이 제대로 된 여행이다. 왜냐하면 쾌적함, 편리함과 실제로 체험한 것 사이에는 늘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 속의 모든 근본적인 것, 우리가 이득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노력과 반항에서 자라났고, 세계 감정의 모든 실제적 증가는 우리 존재의 사적 영역과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점점 더 기계적으로 진보하는 여행은, 외부에서 낯선 것에 다가가려 하고 새로운 경치로부터 정말 활기차고 강렬한 인상을 영혼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에게 득보다는 위험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스스로 발견하지 않은 곳, 혹은 적어도 발견했다고 착각한 곳, 숨겨진 힘과 호의가 우리를 새로운 것들로 이끌지 않은 곳, 거기에는 즐거움 속의 은밀한 긴장감이 부족하다. 이를테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과 우리의 경탄하는 눈길 사이의 연결이 부족한 것이다. 우리가 체험들을 편안히 대접받지 않으면 않을수록, 우리는 새로운 것들을 모험적으로 대할 것이며, 결국 여행과 우리는 좀 더 긴밀하게 연결될 터다. 산악 철도는 멋지다. 그것들은 단 한 시간 만에 우리를 어마어마한 산맥 위로 데려다준다. 우리는 편안하게 저 아래서 굽이치는 세상을 빙 둘러보며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기계적으로 산을 오르는 것에는 뭔가 정신적인 매력, 묘하게 흥분되는 자부심, 정복감이 결여되어 있다. 이 기이하면서도 참된 체험의 감정을 그리워할 만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적극적으로 여행하는 대신에 수동적으로 여행하는 사람들, 여행 비용을 지갑에서 꺼내 여행사 창구에 지불하는 사람들, 그러나 다른 비용, 즉 보다 고귀하고 보다 가치 있으며 내적 의지와 긴장감에서 나오는 비용만은 지불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행하면서 맞닥뜨리는 불편과 손해는 훗날 아주 풍요롭게 대갚음 받을 수 있다. 우리가 불쾌함, 불편함, 착오를 치르고 얻은 인상의 기억만이 유난히 밝고 강렬하게 남으며, 또 여행의 사소한 힘겨움, 곤란, 혼돈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나이 들어서 젊은 시절의 가장 우둔하고 어리석은 짓을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사랑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일상적 삶이 점점 더 기계적이고 질서 정연한 기술 시대의 매끄러운 선로 위를 달리는 것을 우리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다. 어쩌면 전혀 그러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단순하고 편리해질수록 우리의 힘이 절약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은 낭비여야만 하고, 우연을 위해 질서를 포기하고, 비정상적인 것을 위해 정상적인 것을 포기해야 하며, 우리의 성향 중에서도 가장 사적이고 가장 독특해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대량 이동, 여행업의 참신하고 관료주의적이며 기계적 형태에 맞서서 여행을 보호해야만 한다.
  우리 세상을 지나치게 정돈하고 축소해 놓은 공간 속에서 실용적인 중개업자의 화물처럼 모험하지 말자. 그 대신 자발적인 의지로 자주적인 목표를 향해 고풍스러운 방식으로 저 멀리 여행하자. 그래야만 비로소 여행은 외적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 내적 세계의 발견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치면 패키지 여행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까? 
- 작가의 여행에 대한 이런 생각은 나도 동의한다. 물론 난 패키지 여행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강제로 참석해야 하는)수학여행이나 단체여행은 해 본적이 있으니까 그런 여행에서 비일상을 못 만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다. 더 적게 만나긴 하겠지만. 
- 그리고 여행에 대한 다른 글도 생각났는데 여행을 하는 이유가 현재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해서 가는 거라고.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면 굳이 여행을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여행을 통해 뭔가를 배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즐거움을 위한 여행도 있으니까 즐기러 가는 여행도 자신의 현재 생활에 만족해도 갈 수 있지만, 직업이 아닌데도 여행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현재에 불만족스러워서 그러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긴 한다.
- 요즘 심심하면 책을 읽어서 일상이 심심하지 않다. 비는 시간도 별로 없고 여행 생각도 나지 않고 뭔가 사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없다. 현재의 삶에 만족해서 그러는 게 아닐까 싶다. 스트레스 받는 일을 할 때는 물건을 사거나 뭔가를 먹거나 하면서 욕구를 채우려고 했었는데 요즘은 물욕도 식욕도 과하게 생기지 않는다. 
 
- 161쪽
나는 이미 첫날 거대한 차이를 발견했다. 1914년 빈에서의 전쟁 발표는 무아지경, 엑스터시였다. 사람들은 그저 책을 통해서만 전쟁을 알고 있을 뿐이었고, 이 문명화된 시대에 전쟁이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발발했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얼마나 잔혹해질지 몰랐으므로, 느닷없이 자극받은 환상은 낭만적인 모험처럼 전쟁에 대해 유치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엄청난 대중이 집에서, 회사에서 거리로 물밀듯 밀려 나왔고, 도취된 행렬을 이뤘다. 갑자기 깃발들이 등장했다. 대체 어디서 났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음악이 들렸다. 사람들은 합창을 했고, 이유도 제대로 모른 채 환호하며 환성을 질러 댔다. 젊은이들은 입대 신청을 하려고 관청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너무 늦게 소환되어 위대한 모험을 놓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마다 얘기할 필요를, 모두를 흥분시키는 그것에 대해 말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말을 걸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가령 관공서 안에서는 임무를 잊었고, 사업장 안에서는 사업을 잊었으며, 끊임없이 집에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내적 긴장을 말로 폭발시키기 위해서였다. 빈의 레스토랑과 카페는 한 주 내내 한밤중까지 토론하고, 격앙되고, 불안해하며 항상 수다를 떠는 사람들로 붐볐다. 개개인 모두가, 전략가, 국가 경제학자, 예언자였다.
  이것이 1914년 빈의 이미지,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미지로 내게 남아 있다. 그후 1939년 영국의 이미지, 이 또한 잊을 수 없는 대조를 이룬다. 1939년 전쟁은 갑작스레 일어난 의외의 사건이 아니라, 단지 실제가 되어 버린 두려움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모든 나라에서 전쟁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까이 더 가까이. 사람들은 이 전쟁을 되도록 멀리 떼어 놓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왜냐하면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지 벌써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관찰을 통해 전쟁이 낭만적인 상상의 동물이 아니라 모든 악마의 기술로 무장한 거대한 기계임을, 오래 회전하는 동안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인간과 돈을 소모하는 기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어떤 환상도 갖지 않았다.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고, 오직 모두가 놀랐다. 모두 자신의 나라에, 세계에 이제 어둠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사람들은 전쟁을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 184쪽
괴테는 인간에게 다음과 같이 간청했다.
 
  그대는 지배하고 이겨야만 한다.
  아니면 헌신하고 잃어야만 할 것이다.
  시달리거나 승리해야만 하며,
  모루이거나 망치가 되어야만 한다.
 
  자, 괴테가 제시한 이 양자택일, '그대는 지배하거나 잃어야만 한다.'라는 말에 내가 반대하더라도 부디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 생각에 한 인간은--마찬가지로 한 민족은--지배해서도 헌신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인간은 자유러워야만 하며, 각각의 타인에게 자유를 주어야만 한다. 우리가 빈에서 배웠듯 살아야만 하며 살게 내버려 두어야만 한다. 삶의 모든 것에 대한 기쁨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 193쪽
1900년 아버지의 선물로 처음 프랑스 여행을 한 뒤 거의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23세의 슈테판 츠바이크는 헤르만 헤세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여행이라고요? 여행하는 것을 잊어버리셨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아닙니다. 저는 어디든 가고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즐기려 하는 불안을 가지고 있으며, 제가 이것들--제가 가장 좋아하는 재산--을 언젠가 피로와 게으름 속에서 잊어버릴까 봐 나이 드는 일이 제일 두렵습니다."
 
" 자유로운 의지로 그리고 맑은 정신으로 삶과 작별하기 전에, 필히 저의 마지막 의무를 행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저와 저의 작업에 그토록 선량하고 후한 휴식을 제공해 준 이 놀라운 나라, 브라질에게 마음 깊이 감사를 전하는 것입니다. 저만의 언어 세계가 파괴되고 저의 정신적 고향인 유럽이 자멸한 이후, 저는 날마다 이 나라를 더 사랑하게 되었고 특히 이곳이 아니었다면 그 어디에서도 이렇게 철저히 삶을 새로이 시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육십 년을 산 뒤에 다시 한 번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데에는 특별한 힘이 필요합니다. 저의 힘은 오랫동안 고향 없이 떠돈 탓에 완전히 쇠진해 버렸습니다. 저는 제때에 그리고 올바른 태도로 삶을 마감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내 삶에서 정신적 작업은 언제나 순수한 기쁨이었고 개인의 자유는 지상 최고의 재산이었습니다.
  모든 친구들에게 인사를 전합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이 기나긴 밤을 지나 눈부신 여명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지나치게 성급한 저는 먼저 갑니다."

  1942년 2월 22일, 오스트리아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런 유서를 남기고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 이 작가도 자살했다. 내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후기를 썼던가? 작가들은 글을 쓰는 그 감수성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잦은 것일까?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예민하게 세상을 관찰하고 사유해서? 잘못된 세상이 너무 힘들어서?
- 제때에 그리고 올바른 태도로 삶을 마감한다는 것은 좋은 일 아닌가? 제때를 알 수 있다면. 올바른 태도를 알 수 있다면.
- 42년에 자살했으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게 45년이니 3년 후면 전쟁의 끝을 볼 수 있었을텐데. 자살이 나쁘기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다보니 3년 후의 전쟁의 끝을 아는 내가 42년의 작가의 괴로움을 짐작하고 조금 만 더 참지 할 수 있을까?
- 나도 알 수만 있다면 제때에 그리고 올바른 태도로 삶을 마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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